주일예배에 거는 10가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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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 거는 10가지 기대
성도들이 예배에 기대하는 것은 알고 보면 무슨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사실 매우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예배 시작하는 시간을 지켜주는 것 같은 내용들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러한 기본적인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실망을 주는 상황이 우리 교회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다.

지금부터 거론되는 10가지의 기대는 반드시 해야 할 내용이라 다루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필요와 요구는 다를 수 있다. 갓난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이유는 없다. 아비나 어미의 입장에서 갓난아이의 필요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도들의 요구가 모두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근거도 없을 수 있기에, 요청되는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준비된 예배 환경을 원한다.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 이제 와서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다. 봉사자가 너무 멀리에서 오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댄다 해도, 이러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면 정말 짜증나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자! 좋은 방법이 있다. 음향봉사자를 위해 예배시간을 늦추는 것이다. ^^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봉사자를 바꾸거나 부 담당을 세워서라도 준비된 예배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적절한 온도와 조명 상태, 아이들이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둘째, 담임목회자의 따뜻한 환영을 원한다.

성도가 예배의 자리로 나왔을 때는 모두가 믿음의 승리로 인해 기쁨이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가슴 벅차게 예배의 자리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견디기 어려운 상한 마음을 경험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무미건조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울 것이고 또 죽고 싶을 만큼 고통의 밑바닥을 경험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이들에 별다른 관심을 보여주지 않지만,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교회는 그래도 날 사랑하고 용납해 주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예배인도자의 분명한 인도를 원한다.

예배인도자는 다양한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 ‘무엇을 향해 갈 것인지’, ‘어떤 과정이 있을 것인지’를 알려 주어야 한다. 예측할 수 있는 안정감 역시 예배인도자가 성도들을 위해 배려해야 할 요소이다. 준비된 멘트를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성경에서 찬양을 촉구할 때는 으레 명령형을 사용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찬양어 ‘할렐루야’ 도 ‘주님을 찬양하라’ 역시 명령어이다. ‘"주님을 찬양하면 좋지 않겠느냐" 나 "한번 주님을 찬양해 보자"는 식의 권유나 부탁은 분명 성경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넷째, 밝고 공감할 수 있는 찬양과 연주를 원한다.

교회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신종 어른들이 생겼다. 바로 새로운 교회 음악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 너무나 전투적인 가사의 내용들이 마음에 무거움을 가져와서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미숙아의 인큐베이터가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사관학교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정이 생략될 수는 없다. 훈련 받을 만한 사람이 먼저 되도록 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찬양 선곡을 한다면 무리가 있다. 교회는 천국을 맛보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전하려 하지 않겠는가!

다섯째, 그리스도를 나누는 자리이기를 원한다.

세상 모임과 교회가 분명히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세상은 자기 자랑으로 가득하지만 교회는 주님 자랑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만약 교회마저 교회, 목회자, 성도들 자랑만 하다가 떠난다면 교회라 할 수 없다.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를 나누는 자리이다. 그리스도를 나누는 가장 좋은 두 가지 방법은 성찬과 간증이라고 생각한다. 성찬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을 기념한다. 피로 맺어진 가족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간증 역시, 주님을 자랑하는 시간이다. ‘그가 내게 어떤 일을 행하셨나?’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여섯째, 방문자를 향한 배려를 원한다.

성도가 이웃과 친구들을 처음 교회에 대리고 나오려고 해도 걱정이 많다고 한다. 이유는 그들을 배려한 순서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표현과 언어가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독특한 문화라는 생각 때문인데, 변명하고 싶지만 굳이 부정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처음 방문한 이들 있다면, 요즘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상황에서, 어쩌면 기적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모른다. 별도의 프로그램만 만들려하지 말고 주일예배에서 구도자를 대하는 자세로부터 출발하여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일곱째, 길지 않는 광고를 원한다.

가끔은 설교가 아니라 광고를 들으려 교회에 온 것 같다는 성도들의 피드백을 듣곤 한다. 얼마나 강조를 하는지 설교만큼이나 부담을 갖고 들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교회를 나서며 설교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광고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주일예배모임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도들 역시 예배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광고의 방법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여덟째, 명확하고 확신 있는 설교를 원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거의 대부분 설교중심이다 보니 예배에 대한 인식이 잘못 형성된 면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설교의 역할이나 준비를 소홀히 여길 순 없는 법이다. 설교자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만든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자신을 움직인 말씀은 분명 나의 오늘이란 시간 속에 들려졌기 때문이다. Text(본문)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Context(배경)을 중요성을 알고 성도들에게 명확하고 확신을 주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홉째, 자발적인 헌금을 원한다.

최근 들어 예배당 입주에 헌금함을 놓고 성도들이 들어가면서 헌금을 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 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것보다 심리적 압박이 덜하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그 반대로 성도들이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게 된다는 의견을 받아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교회들 역시 여전히 많다. 나름의 강조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 방식에 대한 논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기복주의 신앙관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헌금은 변화가 필요하며 자발적인 헌금을 위한 격려와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열 번째, 성도간의 진정한 친교를 원한다.

물론 군중 속에 숨고 싶은 이들이 왜 없을까마는, 여전히 성도들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삶을 나눌 교회의 진정한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또 그렇게 불려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를 관망하지 말고 길을 모색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성도가 너무 많아서...’ 라는 이유로 그렇게 하기 어렵라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지 않는 ‘너무’ 많은 것이기에 적절한 조치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쉼과 격려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교제권을 만드는 일에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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